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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에 들어서다.

조선왕조 비운안고 오늘도 애처로이/입구도 보잘것 없고 단청도 칠하지 않은 몇채의 건물들/여염집과 다를바 없으나 정갈하고 아늑한 분위기/정교한 짜임새가 어느 궁궐보다 아름다운 창덕궁. 비원으로 더 잘 알려진 창덕궁 안에는 궁궐 답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들어서는 문도 보잘 것 없고 단청도 칠하지 않은 몇 채의 건물이 모여 일반 양반집을 연상시키는 곳. 그러나 건물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전체적인 짜임새는 어느 궁궐보다 단연 뛰어난 곳. 바로 인정전 동쪽 100여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낙선재입니다.

++ 창덕궁의 모습입니다.



낙선재는 창덕궁 안에서도 독특한 건물입니다. 돈화문에 들어선 뒤 인정전을 거쳐 편전인 선정전, 왕의 침전인 희정당을 지나 동쪽 한켠에 자리잡은 이 건물은 본디 상을 당한 왕비와 후궁들의 거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건물은 전체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아기자기함이 엿보입니다. 건물 내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왕조의 비운을 간직하고 이곳에 살다 지난 89년 숨을 거둔 이방자씨와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 다른 어느 건물보다 정갈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년) 창경궁의 부속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창덕궁으로 바뀌게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궁궐을 헐어낼 때 헐리지 않고 남아 창덕궁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건물 구성은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세 건물이 옆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뒤편에 후원과 화계가 조성돼 있습니다. 대청에 올라서면 오른쪽에 2개, 왼쪽에 1개 들어서 있는 방의 문 창살 문양이 특이합니다. 최대한 모양을 내 다양하게 꾸몄으며 방마다 문양을 서로 다르게 했습니다. 어떤 곳은 문틀을 원형으로 만들어 멋을 냈지요. 순종의 계비 윤비가 지난 66년 숨질 때까지 살았던 곳이며 이방자씨도 이 건물에 머물렀습니다.

청덕궁 영역 내에 소속된 낙선재에서 보는대로 그 뒤뜰에 아름다운 화계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보고 나온 한 외국인이 "정원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정원을 다 구경하고도 그같은 물음을 물었다는 사실이 한국정원의 한 특징일 수 있습니다. 한국정원은 발을 들여 놓을 데가 없이 오밀조밀 화초나 잔디를 심지 않습니다. 마당이 생활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낙선재는 화계의 아늑한 분위기뿐만 아니라 담장 밖에는 삼백년 된 느티나무가 보이고, 담 너머 보이는 상량정과 한정당의 운치가 이곳의 품위를 말해 줍니다. 중국정원의 압도하는 자연의 경외감이나, 일본정원의 울타리 안의 정적감과는 달리, 울타리 밖의 차경과 안의 분위기를 대조하는 맛이 한국정원의 아름다움입니다.







궁궐과는 다른 이름의 단아함, 낙선재를 보다.


궁궐이란 무엇인가요? 왕이 사는 곳입니다. 왕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뜻일까요? 왕도 사람인 한 먹고 자고 쉬고 놀고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하는 그런 일상 생활 외에 왕조국가에서 한나라의 통치자요 주권자였던 왕은 그의 고유한 업무,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한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일년에 몇 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일상생활은 물론 공식적인 활동까지도 거의 대부분 궁궐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궁궐은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곳,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습니다.
궁궐은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일제가 물러가고 해방이 된 뒤 혼란과 전쟁,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친 격랑의 와중에서 죽어 껍데기로 남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의 산물도 함께 바뀌는 법, 문화재라는 것은 어차피 그런 죽은 모습, 껍데기로 남는 것이 숙명이겠습니다. 왕조시대가 아닌 오늘날 어쩌면 궁궐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겟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재, 우리 궁궐을 놓고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걸리는 문제가 많습니다.
시인 윤제림씨는 그의 책에서 '조선조를 대표하는 화가 정선의 호 '겸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가 떠오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응봉의 산자락 아래, 거기에 창덕궁은 슬픈 몸짓으로 서 있습니다. 가랑비 속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여기저기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아픈 기억들에 짓눌린 듯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회색의 도시, 거기서 내뿜는 진사와 소음이 마구 끼얹어지는 수모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지요. 그러나 한 나라의 궁궐로서의 체모를 조금이나마 지키기 위해 입을 앙다물고 버티고 있습니다.




일탈의 아름다움을 꿈꾸다.

자못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일탈이 우리 땅에선 당당히 미학의 한 요소가 됩니다. 사실 우리 건축에서 이 같은 사례를 보여주는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지만 창덕궁을 앞설 만큼 그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이라는 버젓한 정궁을 두고도 그보다 작은 창덕궁에 머물기를 즐겼던 까닭은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겁니다. 자연의 지세에 별다른 변경을 가하지 않은 채 대문을 내고 또 그에 어울리는 건물들을 적절한 장소에 배치했기에, 창덕궁은 경복궁처럼 좌우대칭과 남북 축선으로 이루어지는 정연한 구도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인공이 아닌 자연스러움과 어머니의 손길 같은 따뜻함과 섬세함이 알게 모르게 묻어납니다. 우리 선조들이 갈고 닦은 일탈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곳엔 단청을 칠하지 않아 사대부집 같은 한옥도 두 채나 있습니다. 후원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연경당과 후원으로 빠지기 직전 남쪽 낮은 언덕 아래 넓게 터잡은 낙선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낙선재는 430간이나 되는 아주 큰 한옥으로 사랑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낙선재는 순종 승하 후 순정효황후 윤비와 왕실 가족들이 최근까지 생활했던 곳이기에 조선왕실의 생생한 흔적이 묻어나는 곳입니다. 1963년에는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왕과 영왕비 이방자 여사, 그리고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우여곡절 끝에 함께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낙선재는 순종효황후 윤비와 왕실 가족들이 1963년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최근까지 생활했던 곳입니다. 정문인 장락문에서 상량정을 바라보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낙선재의 정문인 장락문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인데 '오래도록 즐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신선이 산다는 월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은 조선왕실의 종말을 예고라도 한듯 현실세계에서의 영화가 끝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과 이상을 이상세계에서 달성하고픈 소망을 담아 장락문이란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궐이란 무엇인가요? 왕이 사는 곳입니다. 왕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뜻일까요? 왕도 사람인 한 먹고 자고 쉬고 놀고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하는 그런 일상 생활 외에 왕조국가에서 한나라의 통치자요 주권자였던 왕은 그의 고유한 업무,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한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일년에 몇 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일상생활은 물론 공식적인 활동까지도 거의 대부분 궁궐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궁궐은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곳,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습니다.





조선황실의 비운, 낙선재를 품다.

낙선재는 한국 조선황실의 슬픈 사연을 묻어 놓은 곳이기도 합니다.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두 조국을 섬긴 영왕비 이방자여사.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비. 몰락한 왕조를 마지막까지 보듬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세 여인. 낙선재의 핏빛 설움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조선왕조의 위엄과 체통을 마지막으로 묻은 곳, 낙선재.「황제의 외동딸」로 태어나 정신병 환자로 일생을 마친 덕혜옹주. 일본 왕실 제일의 왕녀로 출생해 두 조국을 섬긴 이방자 여사. 2000년 우리 역사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비. 낙선재는 이 세 여인의 한과 눈물이 서린 곳입니다.
고종의 3남인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1989년 생을 마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습니다. 이방자 여사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 때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온 영왕과 정략결혼을 했지요. 1963년 뇌경색으로 투병중인 영왕과 함께 귀국했으나 남편은 병원신세만 지다가 임종 직전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낙선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큰 아들은 귀국한 뒤 얼마 안돼 사망했고, 둘째 아들 구는 미국에서 줄리아 여사와 결혼했다가 이혼해 일본 어느 호텔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영왕의 여동생인 덕혜옹주 역시 대마도주와 강제결혼을 했다가 이혼, 신경성 질환을 견디며 낙선재에서 머물다 숨을 거뒀습니다. 덕혜옹주의 딸 정혜는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왕조의 몰락과 왕손들의 말로가 아픔과 쓸쓸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몰락한 왕조를 마지막까지 보듬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세 여인과 아들. 낙선재는 한국인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에는 "이 문을 들어서면 선경이고, 선경 안에서 신선처럼 즐거움을 끝없이 누릴 수 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 엽지선이 쓴 이 글은 서예학상으로는 가치가 있지만 낙선재 주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지난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